맨위로가기

이란 유대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란 유대인은 기원전 727년경부터 페르시아에 거주해 온 유대인 공동체이다. 고대 페르시아 시대부터 다양한 시대를 거치며 페르시아, 현재의 이란 지역에서 유대교 신앙과 문화를 유지해 왔다. 이란 유대인들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바빌론 유수 이후에도 페르시아 왕들의 관대한 정책으로 공동체를 유지했다. 현재는 이스라엘, 미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이란 내에도 소수의 유대인들이 남아 있다.

2. 역사

이란 유대인의 역사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 바빌론 유수로부터 풀려난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의 여러 기록은 당시 페르시아 왕들이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재건을 지원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며 이란 내 유대인 공동체는 명맥을 이어왔다.

오랜 세월 동안 이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얼마나 유지해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들이 아르메니아인처럼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유지해왔다고 보는 반면[16], 미국 의회도서관의 연구는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이 문화적, 언어적으로 비유대인 이란인들과 구별하기 어려워졌으며, 대부분 페르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17]

2. 1. 고대

유대인들은 기원전 727년경부터 페르시아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아시리아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포로로 잡혀 노예 신분으로 이 지역에 오게 되었다. 한 유대인 전설에 따르면, 페르시아 땅을 밟은 최초의 유대인은 총대주교 야곱의 손녀인 사라 바트 아셰르였다고 한다.[9]

성경의 이사야서, 다니엘서,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역대기, 에스델기에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유대인들이 겪었던 삶과 경험, 그리고 페르시아 왕들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특히 에즈라기에는 페르시아 왕들이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재건을 허락하고 지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성전 재건은 "키루스 2세 보졸그와 다리우스 1세와 페르시아 왕 아르탁세르크세스의 포고에 따라" 이루어졌다(에즈라기 6:14).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이 사건은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일어났으며, 이는 당시 페르시아에 이미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고대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했다. 이들은 이란 내의 고대 공동체뿐만 아니라, 유대계 아르메니아인, 유대계 조지아인, 유대계 이라크인, 부하라 유대인, 산악 유대인 등 다른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와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10][11][12][13][14] 그러나 일부 공동체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른 유대인 공동체와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페르시아 유대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는 것은 실제 역사적 관계보다는 언어학적 또는 지리학적 편의에 따른 분류일 수 있다. 학자들은 페르시아 제국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는 유대인이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5]

이란 유대인들의 정체성 유지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존재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유대인들이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 이후 이란에서 거주하며, 아르메니아인들처럼 자신들의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유지해왔다고 설명한다.[16] 하지만 미국 의회도서관의 이란 국가 연구 보고서는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오랜 세월 동안 이란의 유대인들은 신체적 특징이나 문화, 언어 면에서 비유대인 이란인들과 구별하기 어려워졌으며, 대다수가 페르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일부는 쿠르드어를 사용한다고 본다.[17] 성경에 등장하는 다니엘, 하박국[5], 에스더, 모르드개 등은 고대 페르시아 시대 유대인과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2. 2. 바빌론 유수와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

유대인들은 기원전 727년경부터 페르시아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아시리아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정복당한 후 포로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페르시아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유대인은 총대주교 야곱의 손녀인 사라 바트 아셰르였다고 한다.[9]

성경의 이사야서, 다니엘서,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역대기, 에스델기에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유대인들이 겪었던 삶과 경험, 그리고 페르시아 왕들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에즈라기에는 페르시아 왕들이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재건을 허락하고 지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성전 재건은 "키루스 2세 보졸그와 다리우스 1세와 페르시아 왕 아르탁세르크세스의 명령에 따라"(에즈라기 6:14) 이루어졌다. 유대 역사에서 이 중요한 사건은 기원전 6세기 후반에 발생했으며, 당시 페르시아에는 이미 안정적이고 영향력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기원전 597년,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2세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후 기원전 586년에는 시드기야 왕 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고, 지배층과 귀족을 포함한 많은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바빌론 유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느부갓네살 2세의 신임을 얻었던 예언자 다니엘수사(현재 이란령 슈슈)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1]

기원전 537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코레쉬)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면서 바빌론에 있던 유대인을 포함한 포로 민족들에게 해방령을 내렸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되었고, 42,462명의 유대인이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가 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방에 정착했으며, 이곳에는 페르시아에서 파견한 사트라프(총독)가 임명되었다.

다리우스 1세(다리우스)의 통치 시기인 기원전 515년, 예언자 하가이와 스가랴의 격려를 받은 스룹바벨의 주도 아래, 유대인들은 왕의 지원을 받아 예루살렘제2성전을 완공했다. 이후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파괴된 도시 성벽을 보수했다. 기원전 458년에는 예언자 에스라의 지도 아래 두 번째 대규모 귀환이 이루어졌다.[2]

고대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은 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이들은 이란의 고대 공동체뿐만 아니라 유대계 아르메니아인, 유대계 조지아인, 유대계 이라크인, 부하라 유대인, 산악 유대인 등 다양한 유대인 집단과 함께 존재했다.[10][11][12][13][14] 일부 공동체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른 유대인 공동체와 고립되어 있어, 이들을 '페르시아 유대인'으로 묶는 것은 실제 역사적 관계보다는 언어학적 또는 지리학적 편의에 따른 분류일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페르시아 제국 전성기에 유대인이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5]

유대인의 이란 거주 역사에 대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유대인들은 이란에서의 그들의 유산을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아르메니아인들처럼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고 설명한다.[16] 반면, 이란에 대한 미국 의회도서관의 국가 연구는 "수세기에 걸쳐 이란의 유대인들은 신체적, 문화적, 언어적으로 비유대인 이란인들과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소수는 쿠르드어를 사용한다"고 기술하여 상반된 시각을 보여준다.[17]

2. 3. 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 시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멸망한 기원전 330년 이후, 페르시아 영토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후계자들의 전쟁(디아도코이)으로 인해 이스라엘이집트의 유대인들이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사이의 분쟁 지역에 속하게 된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기원전 166년,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반란으로 유대인들은 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약 30년 뒤 안티오쿠스 7세에 의해 다시 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기원전 129년 안티오쿠스 7세가 파르티아를 침략했다가 패배하고 전사하면서 유대인 국가는 다시 독립을 회복했다. 이 시기 파르티아에 있던 하스몬 왕조의 왕 요하네 히르카누스 1세는 현지 군주와 비밀 협약을 맺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멸망한 후,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했다. 당시 왕이었던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포로로 잡혀 로마로 압송되었고, 그의 형 히르카누스 2세가 로마의 괴뢰 군주로 세워졌다. 그러나 기원전 40년, 히르카누스 2세는 파르티아의 지원을 받은 조카 안티고노스에 의해 폐위되었다. 당시 파르티아 영토였던 바빌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폐위된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오히려 바빌론 내부의 분쟁으로 인해 유대인 사제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아르사케스 왕조의 파르티아는 이란 전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지만, 정치적으로는 각 지역의 속국과 속왕을 아르사케스 왕가가 통솔하는 지방 분권적인 형태를 띠었으며,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1세기에는 현재 이라크 아르빌에 해당하는 알베라를 수도로 삼았던 속국 아디아베네 왕국의 지도층이 유대교로 개종하고 예루살렘 성전 건설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당시 파르티아 영토였던 바빌로니아에 수많은 유대인이 거주했다고 기록했다. 로마와 이스라엘 간의 유대 전쟁 중, 특히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많은 유대인이 동쪽의 파르티아 영토로 피난했다. 이후 바빌론의 유대인들은 로마와 대립하던 파르티아를 지속적으로 지원했으며, 파르티아 군주는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ריש גלותא|레슈 갈타he'(유랑민의 우두머리)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

3세기 초, 유대인 학자들은 파르티아 영토 내의 수라, 네하르데아, 품베디타에 세워진 학원에서 탈무드를 편찬하는 중요한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제국이 멸망하고, 중앙 집권적이며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은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했다. 259년 사산 왕조는 수라의 유대인 학원을 폐쇄하고 파괴했다.

2. 4. 사산 왕조 시대

226년 아르다시르 1세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사산 왕조를 세웠다.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마니교,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유대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샤푸르 1세는 유대인들에게 관용적인 정책을 펴 그들의 공동체 발전을 도왔다.

4세기에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샤푸르 2세는 어머니가 유대인 출신이었던 영향으로 제국 내 유대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2. 5. 초기 이슬람 시대

639년 카디시아 전투와 644년 니하반드 전투에서 아랍 이슬람 군대가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후 사산 왕조는 멸망하고, 이란 지역에는 무슬림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슬람 샤리아 법이 적용되면서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지미( ذمي|디미ar )'로 분류되었다. 이는 이전 시대와 같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는다는 의미였으며, 동시대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였다. 하지만 이러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두세인 지즈야와 토지세인 하라주를 납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무슬림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에도 이란의 유대인들은 의사, 학자, 장인 등 다양한 전문 직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특히 마샤알라(Masha'allah ibn Athari)와 같은 뛰어난 유대인 학자들은 군주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중용되기도 하였다.

2. 6. 몽골 제국 (일칸국) 시대

1256년 몽골 제국의 창시자 칭기즈 칸의 손자 훌레구는 이란 북동부 호라산 지방의 통치권을 확보하고, 2년 뒤인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시켜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현재의 발루치스탄 지방부터 서쪽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일칸국(훌레구 울루스)을 세웠다. 이 시기 이란-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는데, 이는 군주들이 유대계 지식인을 등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초기 일칸국은 넓은 영토와 다양한 피지배 민족 구성으로 인해, 기존의 이슬람교도뿐만 아니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경교) 신자와 유대교 신자들에게도 비교적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실제로 훌레구의 아들 아바카는 경교도였으며, 그의 아들인 아르군은 유대인 사아드 알다울라(سعد الدولة ابن هبة الله|사드 알다울라 이븐 히바트 알라ar, Sa'ad al-Dawla)를 재상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르군 사후 발생한 내부 분열 끝에 1295년 그의 아들 가잔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란이슬람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이교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인두세 징수도 다시 이루어졌다. 기독교 교회, 유대교의 시나고그, 불교 사찰 등 이교도의 종교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탄압 정책은 가잔 칸의 동생인 올제이투 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유대인 의사였던 라시두딘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2. 7. 사파비 왕조, 아프샤르 왕조, 카자르 왕조 시대

몽골 제국 이후 들어선 사파비 왕조시아파를 국교로 삼으면서 유대인을 포함한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유대인들은 불결한 존재로 취급받아 일상생활에서 여러 제약을 받았으며, 유대인임을 표시하는 휘장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했다. 아프샤르 왕조의 나디르 샤는 시아파의 성지인 마슈하드에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그가 암살된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마슈하드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 즉 포그롬이 일어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했다. 그러나 마슈하드의 강제 개종자들은 겉으로는 이슬람교도처럼 행동하면서도 비밀리에 유대교 신앙을 지켜나갔다. 이들은 1946년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현재까지도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2. 8. 이란 이슬람 공화국 시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유대인 공동체는 이란에 존재한다.[4] 이란 혁명 직전 약 8만 명이었던 유대인 인구는 혁명 이후 상당수가 이스라엘 등으로 이주하면서 크게 감소했다. 1948년 10만 명에서 15만 명에 달했던 인구는 이미 혁명 이전에 이스라엘로의 이민 등으로 8만 명 수준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1970년대 들어 이스라엘로의 이민이 주춤하며 인구가 안정되는 듯했으나, 정권이 붕괴되면서 남아있던 유대인 대다수가 이란을 떠났다.

2000년대 들어 이란의 유대인 인구는 25,000명(2006년, 2007년, 2008년 추정치)으로 추정되었으나[20][21][22], 추정치는 다양하여 1998년에는 40,000명[23], 2010년에는 17,000명[24]으로 추산되기도 했다. 2012년 8월 공식 인구 조사에서는 8,756명으로 집계되었고[25], 2016년 인구 조사에서는 9,826명으로 나타났다.[8] 2021년 기준으로는 8,500명의 유대인이 이란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중동에서 두 번째로 큰 유대인 공동체 규모이다.[20]

주요 거주 도시는 테헤란, 이스파한 (1,200명)[26], 시라즈 등이다. 역사적으로는 더 많은 이란 도시에 유대인들이 거주했다. 현 이란 헌법 하에서 유대인은 소수 종교 집단으로 보호받으며, 이란 의회 (마즐리스)에 1석의 의석을 할당받고 있다.[21][4]

3. 인구 분포

1900년 유대 대백과사전이란 내 유대인 인구를 35,000명으로 추정했으나[18], 다른 자료에서는 같은 시기에 더 많은 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48년 이스라엘독립하기 직전에는 이란 내 유대인이 10만 명에서 15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해외에 거주하는 이란 유대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페르시아 혈통의 유대인은 약 30만 명에서 35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주로 이스라엘미국, 그리고 이란에 거주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서유럽(특히 파리런던),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남아메리카 등지에도 더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이주하여 살고 있다.

고대부터 일부 페르시아 유대인 집단은 분리되어 산악 유대인과 같은 별개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또한 이란 내에는 이슬람교바하이 신앙으로 개종한 유대인의 직계 후손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3. 1. 이란

1900년 유대 대백과사전이란에 35,000명의 이란 유대인이 거주한다고 추정했지만[18], 다른 자료들은 같은 시기에 더 많은 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48년 이스라엘독립하기 직전에는 이란 내 유대인 인구가 10만 명에서 15만 명에 달했으며, 당시 해외에 거주하는 이란 유대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란의 유대인 인구는 1948년 이후 크게 감소했는데, 이는 주로 이스라엘로의 이민 때문이었다. 이란 혁명 직전인 1970년대 후반에는 약 8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1970년대 들어 이스라엘로의 이민이 잠시 주춤하며 인구가 안정되는 듯했으나, 정권이 무너진 이란 혁명의 여파로 남은 유대인 대다수가 이란을 떠났다.

이란 내 유대인 인구 변화 추이
연도인구 (추정치/조사치)비고
1900년35,000명 이상[18]유대 대백과사전 및 기타 자료 추정
1948년 (독립 직전)100,000 ~ 150,000명
1979년 (혁명 직전)약 80,000명이스라엘 이민 등으로 감소
1998년40,000명[23]추정치
2000년대약 25,000명[20][21][22]추정치 (2006~2008년)
2010년17,000명[24]추정치
2012년8,756명[25]이란 공식 인구 조사
2016년9,826명[8]이란 인구 조사
2021년약 8,500명추정치



2000년대 들어 이란의 유대인 인구는 다양한 추정치가 있었으나, 2012년 이란 공식 인구 조사에서는 8,756명[25], 2016년 인구 조사에서는 9,826명[8]으로 집계되었다. 2021년 기준으로는 약 8,500명의 유대인이 이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중동에서 두 번째로 큰 유대인 공동체이다.[20] 주요 거주 도시는 테헤란, 이스파한 (약 1,200명)[26], 시라즈 등이다. 역사적으로는 더 많은 이란 도시들에 유대인이 거주했다.

이란 헌법은 유대인을 보호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이란 의회에 1석의 의석을 배정하고 있다.[21]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는 약 30만에서 35만 명의 페르시아계 유대인이 있으며, 주로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미국이란에도 상당수가 살고 있다. 이 외에도 서유럽(특히 파리런던),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남아메리카 등지에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고대부터 페르시아 지역의 유대인 집단 중 일부는 분리되어 산악 유대인과 같은 별개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또한 이란 내에는 이슬람교바하이 신앙으로 개종한 유대인의 후손들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3. 2. 이스라엘

1948년 이스라엘독립하기 전, 이란에는 10만에서 15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많은 이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했으며, 오늘날 이스라엘은 가장 큰 이란 유대인 공동체의 본거지가 되었다. 약 30만에서 35만 명의 페르시아 혈통 유대인이 주로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통계에 따르면, 이스라엘에는 이란에서 태어난 유대인이 47,000명 이상,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이란계 유대인이 약 87,000명 거주하고 있다.[27] 이를 합하면 약 135,000명이며, 더 넓은 범위의 이란계 혈통을 가진 이스라엘인을 포함하면 전체 수는 20만[28]에서 25만 명[29] 사이로 추산된다. 2009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1세대를 포함하여 약 17만 명의 이란 유대인 공동체가 있으며, 이들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다.[30]

이스라엘 내에서 이란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은 홀론이다.[30] 이들은 미즈라흐로 분류된다. 이스라엘의 이란 유대인들은 1980년대 이후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의 리쿠드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31]

이란 유대인 출신의 유명 이스라엘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인물주요 경력 및 정보
모셰 카차브이스라엘 대통령. 이란 야즈드 출생.
샤울 모파즈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및 전 크네세트 야당 대표. 이란 테헤란 출생.
미하엘 벤엘리크네세트 의원.
리타 클라인슈타인가수.


3. 3. 미국

미국에는 60,000명에서 80,000명 가량의 이란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에 정착했으며, 뉴욕주 그레이트넥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도 상당수가 거주한다.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 내에서는 주로 부유층이 거주하는 웨스트사이드의 베벌리힐스샌타모니카, 로스앤젤레스 웨스트사이드 지역인 브렌트우드, 웨스트우드, 웨스트로스앤젤레스 등에 자리 잡았다. 또한 샌퍼낸도밸리의 타자나와 엔시노 커뮤니티에도 많이 거주한다.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이란계 유대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분야주요 활동/경력
지미 델샤드정치인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 시 전 시장
아이작 라리안기업가MGA Entertainment|MGA 엔터테인먼트영어사 CEO, 어린이용 인형 Bratz|브랫츠영어 발안자
밥 야리영화 프로듀서
션 토브영화 배우{{lang」 출연
바하르 수메크영화 배우{{lang」, 「{{lang」 출연


참조

[1] 성경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이사야서 구약성경
[2] 성경 에스라기, 느헤미야기 구약성경
[3] 성경 에스더기 구약성경
[4] 웹사이트 Raeisi’s govt. relationship with Jewish community in Iran ‘constructive, positive’: Jewish MP https://www.presstv.[...] 2024-05-25
[5] 문서 묘
[6] 웹인용 Jewish Population by Country 2023 https://worldpopulat[...]
[7] 웹인용 On Being Persian https://www.huffingt[...] 2019-02-06
[8] 웹인용 Iranian Census Report 2016 https://www.amar.org[...] Iranian Statistics Agency
[9] 서적 Christianity in Persia and the Status of Non-Muslims in Iran Lexington Books
[10] 서적 The Jews of Khazaria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11] 웹인용 Բեն Օլանդերի հատուկ ներկայացումը Նյու Յորքում նվիրված Ռաուլ Վալլենբերգին,Երեքշաբթի 9 Նոյեմբերի 2010 թ. https://web.archive.[...] 2017-12-30
[12] 웹인용 EGHEGIS, [EGHEGIZ, YEGHEGIS, ELEGIS:, Siwnik] – armenia – International Jewish Cemetery Project http://www.iajgsjewi[...] 2017-12-30
[13] 서적 An Ethnohistorical Dictionary of the Russian and Soviet Empires Greenwood Publishing Group
[14] 뉴스 Genetic study offers clues to history of North Africa's Jews http://in.reuters.co[...] Reuters 2012-08-07
[15] 웹사이트 The Jews of Iraq http://www.dangoor.c[...]
[16] 웹사이트 Iran https://www.britanni[...]
[17] 웹사이트 Iran – Jews http://www.country-d[...]
[18] 웹사이트 STATISTICS – Statistics http://www.jewishenc[...]
[19] 웹사이트 The Conversion of Religious Minorities to the Baháʼí Faith in Iran http://bahai-library[...]
[20] 뉴스 Iran's proud but discreet Jews http://news.bbc.co.u[...] BBC News 2006-09-22
[21] 웹인용 Iran Jewish leader calls recent mass aliyah 'misinformation' bid http://www.haaretz.c[...] 2023-06-20
[22] 뉴스 Iran Jewish MP criticizes 'anti-human' Israel acts http://www.ynetnews.[...] Ynet 2008-05-07
[23] 뉴스 Jews in Iran Describe a Life of Freedom Despite Anti-Israel Actions by Tehran http://www.csmonitor[...]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1998-02-03
[24] 웹인용 Jews of Iran and Rabbinical Literature: Preliminary Notes http://www.bjpa.org/[...] Bjpa.org 2013-03-09
[25] 뉴스 Iran young, urbanized and educated population: census http://english.alara[...] Al Arabiya
[26] 뉴스 Op-Ed Columnist – What Iran’s Jews Say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09-02-22
[27] 웹사이트 שנתון סטטיסטי לישראל 2008 – מספר 59 פרק 2 – מספר לוח 24 http://www.cbs.gov.i[...]
[28] 뉴스 Iranian Jews Living in U.S. Have Complex Feelings About Mideast Crisis http://www.foxnews.c[...] Fox News 2006-08-07
[29] 웹사이트 Why are people going to Iran? http://www.jpost.com[...]
[30] 뉴스 ISRAEL: Iranian Jews show solidarity with Iranian protesters http://latimesblogs.[...] Los Angeles Times 2009-06-23
[31] 뉴스 Israel’s Iranian Jews worry about the nuclear deal https://www.washingt[...] Washington Post 2015-04-2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